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구 1세 (문단 편집) === 정계 입문과 권력 장악 === 본격적으로 아흐메트 조구가 정계에 입문하던 시기 알바니아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지방마다 토착 영주들의 입김이 강해 사실상 수백개의 지역으로 쪼개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던 알바니아는 더군다나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거치면서 근대적인 정치 체제를 경험해본 적이 없었고 이러한 후진성은 알바니아의 정치 환경을 매우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이 불안정은 극심해서 1921년 7월부터 12월까지 불과 다섯 달 동안 다섯 번이나 내각이 바뀔 정도였다. 거기에다가 중재를 맡아야 할 인물인 빌헬름 비트(Wilhelm zu Wied, Vilhelm Vidi) 대공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독일에 체류 중인 상황이었다. 한편 아흐메트 조구는 이때 북부 지지층을 기반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계속 키우고 있었고 1920년부터 1년 동안 슈코더르(Shkodër) 주지사, 1921년부터 1924년까지는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다. 내무부 장관 시절인 1923년 총선이 실시되고[* 1923년 이후 알바니아에서 자유 선거는 무려 68년 간이나 시행되지 않는다. 조구가 1인 권력을 장악하고 알바니아 왕국을 설립한데 이어 이탈리아의 침공, [[엔베르 호자]]의 공산 정권 수립 등의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졌기 때문. 그래서 알바니아에서 자유 선거는 [[동유럽 혁명]]으로 공산 정권이 무너진 1991년에야 다시 실시된다.] 조구파가 자유주의 세력에 이어 2번째로 많은 의석을 차지하게 되는다. 이 때를 기점으로 아흐메트 조구는 본격적으로 권력 다툼에 휘말리게 된다. 주된 경쟁자는 저명한 학자이자 알바니아 정교회를 재조직한 [[판 놀리]](Fan Noli, 1882–1965)였다.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던 놀리와 달리 북부 출신 무슬림 지주들을 대변하던 조구는 토지 개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놀리와 극심한 충돌을 빚는다. 여기에 더해 조구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지배하던 코소보 지방의 다수 인구를 차지하는 알바니아인들의 권리 보호를 제대로 부르짖지 않는다는 이유로 급진적 민족주의자들로부터 커다란 반발을 사고 있었다. 결국 1924년 2월 23일 의사당 앞에서 급진파였던 아브니 루스테미(Avni Rustemi, 1895–1924)의 주도로 아흐메트 조구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조구는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넉달 후인 6월 10일 아브니 루스테미가 조구의 부하에 의해 살해당하자 이에 반발한 판 놀리의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한 좌익 쿠데타가 일어나 조구는 유고슬라비아로 쫓겨난다. 이렇게 조구의 정치적 생명은 끝장나는 듯 했으나 판 놀리가 소련과 외교 관계를 맺으려는 것에 불만을 품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지원 아래 조구는 불과 반년 후인 12월 13일 유고슬라비아군과 [[러시아 내전#s-5.2|러시아 백군]] 잔류 세력을 데리고 다시 알바니아 본토로 들어온다. 결국 12월 24일 조구가 다시 수도 티라나를 장악함으로서 판 놀리 정권은 붕괴되고 판 놀리 세력은 이탈리아 왕국으로 망명한다. 이렇게 다시 권력을 장악한 조구는 이듬해 비트 대공을 몰아낸다.[* 사실 실제 통치는 알바니아의 독립이 승인된 1912년부터 1914년까지만 행했고, 1914년에 이탈리아를 걸쳐서 독일군에 합류했는데 독일이 패전했고, 당연히 군주 지위의 박탈이 예상되었지만 알바니아의 정국이 위낙 혼란했기 때문에 일단 명목상의 지위는 어찌어찌 유지하기는 했다. 그러나 알바니아 정세가 혼란했기에 독일에 남아 있었고, 이 때문에 실상 서류상으로만 군주이지 실제로는 허수아비 군주였다.] 이후 알바니아를 공화정으로 전환시켰고 1월에 7년 임기의 대통령에 선출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